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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을 건너온 역사(21) 7. 율곡과 우계, 그들의 학문 (1)조선성리학의 절정, 율곡과 우계의 철학논쟁

입력 : 2020-11-22 12:39:25
수정 : 0000-00-00 00:00:00

임진강을 건너온 역사(21)

 

7. 율곡과 우계, 그들의 학문

(1)조선성리학의 절정, 율곡과 우계의 철학논쟁

 

▲ 늘노리 우계서실터 

 

1572년 여름, 율곡은 벼슬을 사직하고 율곡리로 내려왔다. 우계는 늘 그 자리 이웃 파산의 소개울에 있었다. 둘은 이때 조선의 성리학을 절정으로 이끄는 일대 논쟁을 벌인다. 논쟁은 아홉 차례 편지를 주고받으며 진행됐다. 철학사는 이를 우율논변또는 인심도심논쟁으로 정리한다.

조선의 학문은 이미 성리학을 단순히 받아들이는 단계를 넘어 핵심문제를 풀어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앞서 조선의 지식사회를 휩쓴 토론이 있었다. 퇴계 이황과 고봉 기대승 사이에 벌어진 리·, 사단칠정논쟁. 퇴계는 도덕의 완결성을 추구했고, 고봉은 논리의 정합성에 주목했다. 학문의 근본문제에 관한 것이었다. 도덕을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면 철학은 공리공담일 뿐이다. 반면 합리성이 결여된 주장을 철학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퇴계와 고봉은 그 경계선에서 치열한 논쟁을 펼쳤다. 논쟁은 8년을 이었다. 그리고 다시 6년이 지날 즈음, 잦아들었던 논쟁은 우계가 율곡에게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면서 다시 점화된다.

이기론은 세상 만물의 원리와 작용에 대한 철학이다. 이기론이 사람의 문제로 옮겨오는 것은 필연이다. 철학은 사람이 하는 것. 인간의 욕심인 인심과 사회적 관계를 위한 도덕 즉 도심이 어떻게 생기고 긴장하는가는 중요한 주제일 수밖에 없다.

선비들은 사사로움이 섞이지 않은 도심의 세계를 추구했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일 뿐이다. 부딪치며 사는 현실세계에 완전한 도덕심의 공간을 구축할 수는 없다. 그러니 적당히 때 묻히고 살까? 이런 결론도 받아들일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성인을 추구하는 학문인 성리학에서 도덕적 완성은 중요한 주제였다. 논리적 약점이 있더라도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다.

우계는 애초 고봉의 합리적 주장에 기울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마침 주자 문헌에서 근거를 찾아 도덕의 자기 완결성을 입증하려 했다. 율곡은 도덕과 합리성을 대립적으로 보지 않았다. 논리적인 과정을 통해 도덕심을 드러내고 욕심을 제어하는 원리를 제시했다. 율곡은 성리학의 체계 안에서 최고의 경지를 열어보였다.

 

 

▲ 율곡의 율곡 공원

 

율곡과 우계의 토론은 앞선 논쟁과 달리 짧은 기간에 마무리됐다. “우리 두 사람은 적막한 곳에서 서로 종유하고 있으니.” 그들은 가까이 머물렀기에 수시로 토론할 수 있었다. 영남과 호남으로 나뉘어 편지 한 통에 수개월이 걸렸던 퇴계, 고봉과 달랐다. 며칠, 때로는 하룻밤 사이에 답신을 띄우기도 했다. “밤사이에 안부는 어떠하신지요? 어제 보내 주신 답장을 받고 형의 고상한 뜻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지난 밤 안부를 물으며 어제 보낸 편지에 답할 만큼 가까이 이웃하고 있었다. 편지로만 대화한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들은 수시로 만났고 일상의 만남 속에서도 철학적 사유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십 년 전에 율곡이 나를 찾아와 시냇가 집에서 유숙하였는데, 이때는 중추라서 창 밖에 온갖 풀벌레들이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 잠시도 쉬지 않고 울었다. 나는 감탄하기를, ‘저 미물도 오히려 직분을 다함이 이와 같구나.’ 하였다. 이에 율곡이 말씀하기를, ‘지각이 많은 인간은 이해를 잘 알아 이로운 것을 택하고 편안한 곳에 나아가므로 게을러져 날로 야박해지니, 이 때문에 사람은 본성을 다하지 못한다. 그러나 미물들은 천기가 스스로 움직여 굳이 닦지 않고도 천직을 다하는 것이다.’ 하였다.(성혼 오윤겸과 황신에게. 일부)”

개념어로 가득한 편지글과 달리 이들의 사유가 편안하게 읽힌다.

1백년 뒤 명재 윤증이 임진강을 찾았다. 그는 강에 배를 띄워 화석정을 바라보고, 달이 뜨자 우계로 돌아온다. 마침 화석정을 다시 짓고, 우계의 서실을 복구하던 때였다.

두 선생이 왕래하던 발자취며, 교목이 우거진 숲과 오솔길이 완연히 당일과 같아 그 학문과 도통이 끊어지지 않고 실처럼 이어지고 있으니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밤새도록 감격하고 탄식하게 하였습니다.(윤증. 서경휘에게 답함중에서)”

그들의 발자취는 그때의 오솔길처럼 이어져 있었다. 지금은 반듯한 도로로 닦여 차로 달리면 10분도 안 되는 짧은 거리다. 이 짧은 사이에서 조선의 학문이 활짝 피었다.

 

 

이재석

DMZ생태평화학교장

[임진강 기행], [걸어서만나는 임진강] 저자

 
#12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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